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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 광선Le Rayon Vert, 에릭 로메르(1990)
    보고나서 쓴다 2016. 11. 3. 16:35

    글쓰기 수업에서 추천을 받아서 본 영화.

    프랑스 영화의 부흥을 이끈 작품이라고 한다. 에릭 로메르라는 감독 역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주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데, 델핀이라는 여자가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낼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겪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에도 이런 캐릭터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심지어 이 영화에 대한 관련 백과사전을 통해서 보니, 현대 프랑스인들의 자화상이라고.

    내가 아는 프랑스 여자 캐릭터는 프랑수아 사강 책에 나오는, 쿨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 다하며 사는, 그런 캐릭터다.

    반면, 델핀은 아주 내성적인 성격인데, 남자친구가 있지만 헤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관계가 소원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델핀은 자신 탓이라고 생각한다. 여주인공이 사람을 돕는 답시고 여럿이 노력을 하지만, 죄다 실패하고 만다. 반복되는 장면은 델핀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 울고 잇는 장면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를 보며 고구마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겠지. 하지만 나는 내성적인 편이기 때문에 좀 더 이해가 수월했다. 

    델핀을 위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때로는 고맙지만 때로는 불편하다. 나의 상태를 굳이 바꿔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자신의 삶의 방향성이 더 맞다는 믿음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게 맞아, 너는 틀리고'.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을 하기도 귀찮다. 델핀은 외롭지만 외로움을 위해서 작위적으로 해야하는 행동(남자를 유혹한다거나 의미없는 대화상황에 참여하는 것)은 싫어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적한다. '그래도 해야 돼'. '하지만 그래도 못 하겠는 걸 어떡해'. 자꾸 델핀을 바꿔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실패한다. 델핀은 더더욱 외로워진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들 내가 이상하다고 하니까. 

    그런데 이상할 게 뭐가 있어. 어쩌면 뭐든 사람은 이상해야 한다. 표준 일색인 가운데 독특한 것이 개성아닌가. 이상하다는 말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 쓴다. 그럼 정상은 누가 정하는 거지. 다른 사람의 개성과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 이상한 건 자연스럽다. 

    델핀 역시 모두가 걱정하던 것과 달리,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결국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한다. 녹색 광선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델핀과 그를 달래주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위 '델핀을 위한' 모든 걱정들은 떨어진 해와 함께 사라진다. 

    요즘 드는 생각은, 대체 누구를 위한다는 말이, 도대체 얼마나 위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보통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에 입각해서 충고를 할 때,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너를 위해'에 정말 몇 %나 진짜 '너를 위해'일까. 내가 알기로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나쁘다는 게 아니고 나도 그렇고 그게 자연스럽다. 아마 방금 전까지도 뭘 먹어야 내가 더 행복할까, 뭘 해야 내가 더 기쁠까 고민하다가 상대방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아주 잠깐 그 사람을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고서는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아마도 나의 좋은 기분을 망치는 상대방의 부정적인 상태가 얼른 바뀌길 바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너를 위해'에는 '나를 위해'가 아주 많이 섞여 있다. 누구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노력한다. 그게 아름답지. 하지만 잘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좀 더 겸손해야 하는데. 


    델핀이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설명하는 부분도 답답하다. 고기를 꺼리고 채소를 좋아하는 건 그저 델핀의 기호이다. 델핀이 고기를 먹지 말자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 자신들이 고기를 먹고 있기 때문에, 자꾸 델핀을 설득하려고 한다. 물론, 고기를 먹고 있는데, 육고기의 피가 싫다는 둥, 동물이 불쌍하다는 둥 이야기를 시작하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 있다. 나는 야만적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델핀은 그저 자신이 그렇다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했지만 이야기의 방향은 계속 채식으로 돌아왔다. 델핀은 적어도 남에게 크게 피해나 영향을 끼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취향이 남을 공격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나도 2년 정도 채식을 하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껴봐서 특히 공감됐다. 물론 지금은 고기를 적당히 먹는다. 힘이 너무 떨어져서. 하지만 내가 채식을 했든 말든, 그리고 지금도 채식을 하든 말든, 누구의 충고나 참견도 사절이다. 그때도 지금도 누가 물어보지 않으면 딱히 말하고 싶지도 않다. 


    델핀은 답답한 여자처럼 보이지만, 내게는 솔직히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델핀보다 좀더 교묘하게 운다. 티 안 나게, 무조건 혼자 있을 때. 

    그리고 혼자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나온 젊은 스웨덴 여자처럼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나를 설명하는 게 불편하고, 이해받기 어려울 때마다 곤란하고, 그래서 혼자 있는 게 좋다. 혼자 멋진 광경을 보는 게 좋다. 


    이런 내성적인 여자 캐릭터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약 한달의 휴가 동안 델핀이 겪는 매일의 일들이기 때문에, 서스펜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감정이 크게 고조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섬세하게 장면 선정이 잘 된 것 같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지만 묘하게 재미있다. 검색하다보니 대사들이 대부분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실제처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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